EU, 2026년 '탄소국경세' 전면 시행 앞두고 개도국 반발 격화
인도·브라질·남아공, WTO 제소 예고... 글로벌 기후정의 논란 재점화
- •EU 탄소국경세 2026년 전면 시행을 앞두고 인도·브라질·남아공 등 개도국들이 'WTO 제소'를 예고하며 강력 반발
- •개도국 대EU 수출 15~23% 감소 전망, 인도는 연 120억 달러 손실 예상... '녹색 보호무역주의' 논란 격화
- •미·EU 공조로 글로벌 수입시장 40%가 탄소국경세 체제 편입 예상, 중국은 개도국 연대 강화로 맞불
탄소국경조정제도 본격 가동, 무역전쟁 우려
유럽연합(EU)이 오는 2026년부터 전면 시행 예정인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를 둘러싸고 개발도상국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현지시간 2일 브뤼셀 EU 본부에서 열린 기후변화 고위급 회의에서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표단은 CBAM이 사실상 '녹색 보호무역주의'라며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공식 예고했다.
EU의 탄소국경세는 역내로 수입되는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력, 수소 등 탄소집약적 제품에 대해 생산 과정에서 배출된 탄소량만큼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다. 2023년 10월부터 시범 운영을 거쳐 올해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가며, 2034년까지 단계적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할 예정이다.
EU 집행위원회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공정한 경쟁 환경 조성"이 목적이라고 밝혔지만, 개도국들은 이를 선진국의 일방적 무역 장벽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도 상공부 아룬 쿠마르 차관은 "EU는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탄소를 배출해놓고 이제 개도국의 산업화를 가로막고 있다"며 "이는 기후정의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비판했다.
개도국 경제에 미칠 타격 '심각'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공동 분석에 따르면, CBAM 전면 시행 시 개도국의 대EU 수출이 평균 15~23%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철강 산업 의존도가 높은 인도는 연간 약 120억 달러(약 16조 원)의 수출 손실이 예상되며, 브라질의 알루미늄 산업과 남아공의 철강 산업도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터키 정부는 이미 EU를 상대로 자체 탄소세 도입을 검토 중이며, 중국은 EU산 제품에 대한 보복 관세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중국 상무부 대변인은 지난달 정례 브리핑에서 "일방적 무역 조치에는 상응하는 대응이 있을 것"이라며 경고한 바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탄소국경세가 단기적으로는 무역 마찰을 일으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전 세계 산업의 저탄소 전환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신중한 전망을 내놨다. 하지만 개도국들은 "전환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이 없는 상황에서 일방적 규제만 강요받고 있다"고 반박한다.
기후정의 vs 무역자유, 국제사회 딜레마
이번 논란의 핵심은 '공동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CBDR)' 원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다. 1992년 리우 환경회의 이래 국제 기후체제의 근간이 돼온 이 원칙은 선진국과 개도국의 역사적 책임과 현재 능력의 차이를 인정한다.
EU는 "탄소가격제를 도입하지 않은 국가의 제품이 EU 시장에서 불공정한 가격 경쟁력을 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정당성을 주장한다. 실제로 EU는 2005년부터 역내 배출권거래제(ETS)를 운영하며 기업들에 탄소 비용을 부과해왔고, 이로 인해 EU 기업들이 규제가 느슨한 국가 대비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는 것이 EU 측 논리다.
반면 개도국들은 "산업혁명 이후 200년간 탄소를 배출하며 부를 축적한 선진국이 이제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 따르면, 1850년부터 현재까지 누적 탄소 배출량의 약 79%가 선진국에서 발생했다.
국제법 전문가들은 CBAM의 WTO 합치성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WTO 협정 20조는 환경 보호를 위한 예외 조항을 두고 있지만, "자의적이거나 부당한 차별"을 금지한다. 제네바 국제개발대학원의 메건 리처즈 교수는 "EU가 개도국에 충분한 전환 지원 없이 일방적으로 탄소세를 부과한다면 WTO 분쟁에서 패소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중국의 셈법, 글로벌 기후체제 재편 변수
이 같은 EU의 움직임은 미국과 중국의 기후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2025년 '청정경쟁법(Clean Competition Act)'을 통과시키며 사실상 EU와 유사한 탄소국경세 도입을 추진 중이다. 미·EU가 공조하면 전 세계 수입시장의 약 40%가 탄소국경세 체제 아래 놓이게 된다.
중국은 2021년 자체 배출권거래제를 출범시켰지만, 아직 탄소가격이 EU 대비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중국 정부는 탄소가격 인상과 함께 개도국 연대를 강화하는 양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지난달 베이징에서 열린 '글로벌 남반구 기후정상회담'에는 70여 개 개도국 정상이 참석해 "기후 식민주의 반대"를 선언했다.
한국을 비롯한 중진국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한국은 2015년부터 배출권거래제를 운영 중이지만 탄소가격이 EU보다 낮아 CBAM 적용 대상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EU와 '탄소가격 상호인정' 협상을 진행 중이지만 진전이 더디다. 철강, 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의 대EU 수출 감소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AI 분석] 탄소국경세 시대, 피할 수 없는 미래
CBAM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한 무역 분쟁을 넘어 21세기 국제질서 재편의 단면을 보여준다.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전 지구적 과제와 각국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규범이 만들어지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WTO 제소와 보복 관세 등 무역 마찰이 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EU의 선제적 조치가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을 공산이 크다. 이미 캐나다, 영국, 일본 등이 유사한 제도 도입을 검토 중이며, 2030년까지 주요 선진국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탄소국경조정 메커니즘을 갖출 것으로 예상된다.
개도국들의 반발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단순한 반대를 넘어 대안적 기후정의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선진국의 '기후 부채' 인정과 개도국 녹색전환 지원 확대, 기술이전 가속화 등 구체적인 협상 의제를 만들어야 한다. 2026년 11월 브라질에서 열릴 COP32(제32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중요한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한국 등 중진국은 EU·미국과의 탄소가격 상호인정 협상을 서두르는 한편, 자체 탄소가격 수준을 단계적으로 높여야 한다. 동시에 아세안, 중남미 등과의 기후협력을 강화해 '중진국 연대' 채널을 구축하는 것도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탄소국경세 시대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으며, 선제적 대응만이 경쟁력을 보장할 것이다.
댓글 (5)
이 문제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도 다뤄주셨으면 합니다.
평화적 해결이 최선이겠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네요.
우리나라 외교 전략도 재검토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 부분은 저도 궁금했습니다.
에너지 안보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