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인권최고대표 "배상은 구조적 인종차별 해체의 열쇠"
아프리카계 후손 포럼서 식민지·노예제 유산 청산 촉구… AI 편향도 인종차별 재생산

- •유엔 인권최고대표가 배상을 구조적 인종차별 해체의 핵심으로 규정했다.
- •AI 포함 디지털 기술이 아프리카계 편견을 재생산한다고 경고했다.
- •유엔 총회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인류 최중대 범죄로 공식 선언했다.
유엔 인권수장, 배상 논의 후퇴 경고
폴케르 튀르크(Volker Türk) 유엔 인권최고대표가 배상(reparations)을 "구조적 인종차별을 해체하는 핵심 수단"으로 규정하며, 일부 국가에서 배상 정의를 향한 움직임이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지난 화요일 제5차 유엔 아프리카계 후손 상설 포럼에서 이같이 밝혔다.
튀르크 대표는 지난 수십 년간 반차별법 제정, 독립 인권·평등기구 설립, 배상을 향한 일련의 진전을 성과로 평가하면서도 "아프리카계 후손들이 처한 현실은 여전히 불균등하고 취약하며, 일부 지역에서는 후퇴조차 감지된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빈곤·차별·AI 편향이 교차하는 일상
튀르크 대표가 지목한 문제는 직장, 병원, 학교, 법 집행 현장 등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있다. 모든 지역에서 아프리카계 후손의 빈곤율은 일관되게 높고, 특히 여성·청년·복합차별 피해자일수록 더욱 심각하다.
그는 "인종차별과 비인간화 수사(rhetoric)가 공공기관, 지역사회, 온라인 플랫폼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인공지능(AI)을 포함한 디지털 기술이 아프리카계 후손에 대한 기존 편견을 재생산하고 증폭시키고 있다"고 강조하며, 이 모든 일상적 현실이 "식민주의와 노예제의 직접적 유산"이라고 규정했다.
AI 편향 문제는 국제 인권 담론에서 빠르게 부상하는 의제다. 채용 알고리즘, 형사사법 예측 시스템, 의료 진단 도구 등에서 인종적 편향이 반복 확인되고 있으며, 유엔이 이를 구조적 인종차별의 연장선으로 명시한 것은 기술 규제 논의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유엔이 제시한 세 가지 과제
튀르크 대표는 회원국에 세 가지 구체적 행동을 촉구했다.
첫째, 더 안전하고 공정하며 포용적인 사회의 토대가 되는 반인종차별 법률·정책·관행의 채택과 집행이다.
둘째, 아프리카계 청년과 시민사회 구성원을 모든 수준의 의사결정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셋째, 배상적 정의(reparatory justice)를 향한 동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세 번째 과제와 관련해 그는 유엔 총회가 지난 3월 25일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을 '인류에 대한 가장 중대한 범죄'로 선언한 결의를 채택한 점, 일부 정부와 기관이 공식 사과와 유물 반환을 추진하고 있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배상 정의를 진전시키려는 노력이 일부에서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며 "인권에 확고히 뿌리를 둔 창의적인 옹호 활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식민주의 청산 논쟁: 어디까지 왔나 [전문가 분석]
배상 논의는 수십 년의 역사를 갖는다. 1990년대 이후 카리브해 국가들을 중심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구 식민 열강에 배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됐으나, 실질적 합의로 이어진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는 배상 문제를 국제 의제로 공식화했지만, 미국·영국 등 서방 주요국의 반발로 성과가 제한됐다.
최근 흐름은 달라지고 있다. 2022년 바베이도스가 영연방을 탈퇴하며 배상 요구를 공식화했고, 카리브공동체(CARICOM)는 1조 달러 이상의 배상을 요구하는 공동 전선을 구축했다. 2023년 가나·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도 문화재 반환 압박을 강화하면서 유물 반환이 배상 논의의 실천적 출발점으로 부상했다.
이번 유엔 총회 결의는 이 흐름에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선언과 실질적 배상 이행 사이의 간극이 여전히 크고, 미국·유럽의 국내 정치적 반발이 거센 상황이다.
한국의 시각에서 이 논의는 무관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는 한일 관계의 핵심 현안으로 남아 있으며, 국제 사회의 식민지 배상 규범이 강화될수록 한국의 외교적 입지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유엔이 식민지 범죄에 대한 공식 배상을 국제 규범으로 정착시키려는 움직임은, 동아시아 역사 문제 해결의 국제법적 근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향후 배상 논의는 법적 구속력 있는 국제 협약보다는 양자 간 협상, 상징적 사과, 유물 반환, 개발 원조 연계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AI 편향 문제가 구조적 인종차별의 새 전선으로 부상한 만큼, 기술 기업과 각국 정부의 알고리즘 공정성 규제 강화 압박도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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