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이 공범이 됐다: ICIJ 2025 연간보고서
금융·사법·외교 시스템이 어떻게 권력자의 방패가 됐는가

- •ICIJ 2025 보고서는 보호 시스템이 권력자의 방패로 전락했음을 폭로했다.
- •중국의 반체제 탄압, 암호화폐 사기, 시리아 학살이 '합법적 절차'로 진행됐다.
- •국제 제재·치안 협력 체계의 구조적 허점이 범죄와 억압을 가능하게 했다.
보호해야 할 시스템이 가해자가 됐다
세계 최대 탐사보도 네트워크인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발행한 2025년 연간보고서는 불편한 진실 하나를 공론화했다. 금융 시스템, 국제 제재 체제, 국제 치안 협력망 등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구조물들이 오히려 권력자와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제공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ICIJ와 전 세계 파트너 언론들이 공동 수행한 세 개의 대형 기획 조사— '차이나 타깃(China Targets)', '코인 런드리(The Coin Laundry)', '다마스쿠스 도시에(Damascus Dossier)'—는 각기 다른 지역과 분야를 다루지만, 하나의 공통된 결론으로 수렴한다. 피해는 고장 난 시스템이 아니라, 오히려 '의도한 대로 작동한' 시스템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국경을 넘은 탄압: 차이나 타깃
'차이나 타깃' 조사는 베이징 당국이 해외 반체제 인사들을 추적하는 방식을 심층 분석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인터폴(Interpol) 적색수배 시스템, 유엔(UN) 포럼, 각국 법 집행 요청 채널을 활용해 망명지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믿었던 이들을 압박했다.
서류상으로는 모두 합법적인 절차였다. 인터폴 공지는 정상적으로 처리됐고, 외교 채널은 규정에 따라 가동됐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증언한 현실은 달랐다. 위협과 압박이 끊이지 않았고, 생계와 가족의 안위까지 위태로워졌다. 국제 법집행 협력 체계가 해당 국가 인사들의 탄압 도구로 전용된 셈이다.
이 조사는 민주주의 국가의 법집행 협력 시스템이 권위주의 정권의 초국가적 억압(transnational repression)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구체적 사례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암호화폐의 그늘: 코인 런드리
'코인 런드리' 조사는 암호화폐(cryptocurrency) 플랫폼과 결제 처리업체들이 어떻게 사기 및 자금세탁의 관문이 됐는지를 추적했다. 복수의 외신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속도와 수익을 위해 설계된 시스템 속에서 평생 모은 재산을 잃었다.
문제의 핵심은 기술적 결함이 아니었다. 경고 신호는 미약했고, 감독 체계는 분산됐으며, 책임 소재는 불명확했다. 암호화폐 거래소들은 고위험 거래를 대량으로 처리했지만, 공공과 민간 양쪽의 안전장치 모두 그 규모와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는 핀테크(FinTech) 혁신의 속도와 금융 규제 체계의 대응 속도 사이의 구조적 간극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그 기술을 통제할 제도적 역량은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관료제로 포장된 학살: 다마스쿠스 도시에
세 번째 조사인 '다마스쿠스 도시에'는 시리아의 관료적 구금 시스템을 해부했다. ICIJ 보도에 따르면, 시리아 정권의 대량 학살은 서류 처리와 절차 준수라는 형태로 '일상적 행정 업무'처럼 수행됐다.
더 충격적인 것은 국제 제재와 책임 규명 메커니즘이 이 시스템을 교란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제재는 부과됐고, 결의안은 채택됐다. 그러나 현장에서 행정 명령 한 장이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동안, 국제사회의 대응은 공허한 외침에 그쳤다.
시스템의 역설: 왜 의도한 대로 작동했는데 실패했는가
ICIJ의 세 조사는 서로 다른 지역과 분야를 다루지만, 하나의 공통 구조를 공유한다. 피해가 발생했을 때 어디에도 '고장난 부품'은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 탄압에 활용된 인터폴 시스템은 기술적으로 정상 작동했다. 암호화폐 거래소는 규정 내에서 거래를 처리했다. 시리아 관료제는 자국법에 따라 서류를 발행했다. 문제는 시스템 자체의 설계 논리와 실제 활용 맥락 사이의 간극, 그리고 그 간극을 인식하고도 방치한 국제사회의 구조적 무관심이었다.
앞으로의 전망 [전문가 분석]
ICIJ의 2025년 연간보고서가 던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시스템을 고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면 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성 자체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국제 치안 협력 분야에서는, 인터폴 같은 기구가 회원국의 남용을 차단할 독립적 심사 메커니즘을 강화하지 않는 한, 초국가적 억압의 도구로 악용될 가능성이 계속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일부 전문가들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권위주의 정권의 법 집행 요청에 대해 더 엄격한 독립 검토 절차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암호화폐 규제 영역에서는, 유럽연합(EU)의 MiCA(암호자산시장규제법) 등 주요 관할권의 규제 프레임워크가 본격 시행되면서 일정한 변화가 기대되지만, 규제의 지리적 파편화가 계속되는 한 '규제 차익거래(regulatory arbitrage)'를 통한 우회는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국제 제재 체계에 대해서는, 시리아 사례가 보여주듯 제재가 실제 피해를 막는 데 실효적이지 않다는 비판이 누적되고 있다. 제재의 '상징적 효과'와 '실질적 억지력'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새로운 집행 메커니즘 논의가 국제 인권·외교 분야에서 가속화될 가능성이 있다.
ICIJ의 보고서는 탐사보도가 단순히 사건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 시스템의 실패 구조 자체를 공론화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권력이 시스템의 안에 숨어 있을 때, 저널리즘은 그 시스템의 논리를 해독하는 유일한 도구가 된다.
댓글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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