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황 보충제가 간을 망친다? '자연산'의 역설
허브·천연 성분 보충제의 간 손상 위험, 드라마가 불씨 댕긴 현실 논쟁

- •드라마 '더 핏'이 강황 보충제의 간 손상 위험을 조명해 화제가 됐다.
- •약물 유발 간 손상의 약 20%가 허브·식이 보충제에서 비롯된다.
- •규제 공백 속 고농도 추출 보충제 시장이 커지며 소비자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
향신료를 먹었을 뿐인데, 간이 망가졌다
미국 의학 드라마 '더 핏(The Pitt)'의 최근 에피소드에서 황달 증세의 환자가 병원을 찾았다. 원인은 뜻밖이었다. 건강을 위해 매일 다섯 번 복용했던 강황(turmeric) 보충제였다. 극 중 의료진은 "그 용량의 강황은 간부전을 일으킨 사례가 있다"고 설명했고, 환자는 되물었다. "향신료를 먹었을 뿐인데요?"
이 허구의 대화 뒤에는 냉혹한 사실이 자리한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산하 약물유발 간손상 네트워크(Drug Induced Liver Injury Network)에 따르면, 약물로 인한 간 손상 사례의 약 20%가 식이·허브 보충제에서 비롯된다. '자연산'이라는 라벨이 붙은 제품들이 일으키는 피해다.

왜 '자연'이 간을 공격하는가
강황, 녹차 추출물, 아슈와간다(ashwagandha·인도 인삼), 가르시니아 캄보지아(Garcinia Cambogia), 블랙 코호시(black cohosh) — 이 성분들은 모두 '천연', '허브'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건강 보조식품 시장에서 팔린다. 그러나 이들 모두 간 손상 사례와 연관된 보고가 누적돼 있다.
핵심 문제는 '농도'다. 미국 국립보건원 간 질환 연구 책임자 제이 후프나글(Jay Hoofnagle) 박사는 "대부분의 보충제는 추정 유효 성분의 고농도 정제 추출물"이라며 "원료 허브를 그대로 섭취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농도로 판매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카레에 쓰이는 강황 가루와 보충제 캡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보충제에는 활성 성분인 커큐민(curcumin)이 고농도로 농축돼 있고, 흡수를 촉진하는 흑후추 추출물까지 더해져 체내 흡수율이 극도로 높아진다. 녹차 추출물 캡슐 한 알에는 녹차 한 잔보다 3~8배 많은 녹차 성분이 압축돼 있다.
간은 보충제와 의약품을 구별하지 않는다. '자연산'이라는 라벨은 간에 아무 의미가 없다. 들어온 물질을 그대로 대사할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보충제 시장의 표시 오류 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연구에서 간 손상 의심 사례와 관련된 허브·식이 보충제 272종을 분석한 결과, 절반 이상이 표기되지 않은 성분을 포함하거나 표기된 성분이 실제로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천 년의 역사 뒤에 숨은 현대의 함정
강황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수천 년간 요리와 전통 의학에 활용됐다. 바로 이 긴 사용 역사가 '안전하다'는 인식의 근거가 됐다. 하지만 이 인식은 현대 보충제 산업이 만들어낸 농축 제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2010년대 이후 웰니스(wellness) 산업의 급성장과 함께 강황 보충제 시장은 폭발적으로 확대됐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항염 효과', '항산화 슈퍼푸드'로 알려지며 소비가 급증했고, 최근 몇 년 사이 미국에서 허브 성분에 의한 급성 간 손상의 가장 흔한 원인 중 하나로 부상했다.
규제의 공백도 시장 확대를 도왔다. 미국에서 보충제는 의약품과 달리 판매 전 정부의 안전성·유효성 검증이 의무화되어 있지 않다. 제조사가 '합리적으로 안전하다'는 기준을 자체 판단하는 구조다. 이는 1994년 제정된 식이보충제 건강·교육법(DSHEA)이 만들어낸 규제 공백으로, 30년이 넘도록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앞으로의 전망 [전문가 분석]
전문가들은 보충제의 간 독성 문제가 앞으로 더욱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글로벌 허브 보충제 시장이 지속 성장하는 가운데, 보고되지 않는 간 손상 사례도 상당수 존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성인 기준 하루 커큐민 권장량을 체중 1파운드(약 0.45kg)당 1.4mg으로 제한한다. 체중 68kg 성인의 경우 하루 약 200mg이 상한선이다. 그러나 '더 핏' 속 환자는 하루 2,500mg을 복용했고, 이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일부 제품의 '1일 권장량' 표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규제 강화 논의는 이미 시작됐다. 보충제 라벨링 정확성 강화, 제3자 품질 검증 의무화, 부작용 보고 시스템 확대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수십억 달러 규모의 보충제 산업이 강력한 로비력을 갖추고 있어, 실질적인 변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
소비자 차원에서는 어떤 보충제든 복용 전 의사와 상담하고, NIH의 검색 데이터베이스 '리버톡스(LiverTox)'에서 해당 성분의 간독성 기록을 확인하는 것이 권고된다. 카모마일 추출물이나 오레가노처럼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은 성분이 있는 반면, 카바(kava)·아슈와간다·블랙 코호시는 간 손상 사례와 명확히 연결돼 있다.
결국 '자연산'이라는 표현은 안전의 보증이 아니다. 그것은 마케팅 언어다.
댓글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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